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메리카 연합국 (문단 편집) === 노예제와 남부 경제 === 남부연합을 압도하는 미합중국(북부)의 물량은 발전한 공업에서 비롯되었고, 공장을 가동하려면 당연히 노동력이 필요하였으며, 노예를 자유민으로 만들면 당연히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므로 교육을 받지 못한 노예 촐신 자유민은 해방된 후에도 대부분 공장의 단순 노동 분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노예 제도는 개척 과정에서 등장하였는데 초기의 주력 산업은 담배 농사였다. 하지만 담배 재배에 의해 지력 고갈이 심각해지면서 약탈 농업에 가까운 형태가 되었고 이걸 노예 유지비용과 합쳐 따지면 손익분기점에 근접하고 있었다. 《[[국부론]]》을 저술한 [[애덤 스미스]]는 이것이 이해득실의 문제라는 것을 간파하고 만일 이익으로 결판이 나면 논란이 사라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노예 제도는 산업 혁명 이래로 산업 혁명에 성공한 사회에서도 존재하였지만 그 사회의 경제적 기반이 되지는 못하였는데 이는 노예제의 근본적인 문제인 비효율성 때문이다. 산업혁명 이후 공업이 발전한 북부에서는 노예제를 유지하는 것보다 차라리 노예제를 폐지하고 그냥 임노동자한테 월급을 주는 것이 돈이 덜 든다는 계산이 나온 것이다. 노예제의 대표적인 비효율성은 당연히 본질적인 주종관계에서 나온다. 노예는 열심히 일해봤자 자신의 것이 아니고 재산 축적도 못 하기 때문에 주인이 시킨 일 외에 창의적이고 생산적인 일들을 주도적으로 하지 않았고, 상벌을 주어도 이들이 올리는 성과는 당연히 자유 임노동자들에 비해 극히 낮았다. 또한, 노예를 유지하는 비용은 전부 주인이 부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부의 경제는 이러한 비효율이 상당히 만성화되어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산업혁명 시기 면방직 공업이 발전하면서 노예의 필요성이 급부상하였다. 산업혁명 당시 영국 등 유럽에서는 방직기, 방적기를 포함한 기계화가 이루어져 면방직 산업이 크게 발전하였고 이 때문에 목화의 수요가 급증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목화를 재배하는 데에는 농기계도 없던 시절이라 엄청난 노동력을 필요로 하였다. 미국의 면방직 산업은 영국과는 달리 그리 발달하지 않았고 목화 자체를 수출하는 것이 주력이었다. 1791년 당시만 해도 미국의 목화 재배량은 90만kg 정도에 불과했으나 불과 10년 뒤인 1801년에는 2,200만kg에 달할 만큼 늘어났다. 남북전쟁이 발발하는 1861년에 이르면 미국 전체의 수출 비중에서 거의 60%에 달할 만큼 커졌다. 당시 면직산업에서 기계화의 핵심은 방적기와 방직기였는데, 방적기는 목화에서 섬유를 빼내는 기계이고 방직기는 이를 이용해서 천을 만드는 기계이다. 둘 다 목화를 재배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하는데 반해, 오히려 목화의 수요는 크게 늘어나게 만들어서 그 목화를 기를 일손이 더욱 필요해졌다. 이 때문에 비효율적이던 노예의 필요성이 기계화로 인해 미국 남부에서는 오히려 늘어나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연구결과가 존재한다.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미국의 경제역사학자 '[[https://ko.wikipedia.org/wiki/%EB%A1%9C%EB%B2%84%ED%8A%B8_%ED%8F%AC%EA%B2%94|로버트 포겔]](1926~2013)'은 1974년, 경제이론과 계량적 방법을 사용해서 미국의 노예제도가 오히려 생산 측면에서 더 긍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는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당시 면화 생산량, 진료 기록 등을 살펴본 결과 주인은 노예를 재산으로 여겨 최소한 가축 수준의 복지들을 제공했을 뿐더러, 오히려 그들의 처지가 북부의 하층 임금 노동자에 대한 평균적 대우보다 나은 수준이었음을 밝혔다. 노예 제도를 통해서 얻는 이윤과 생산성은 국가 전체적으로 볼 때에도, 개인적으로 볼 때에도 경제적 이유로 노예를 포기할만한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다. 연구결과만 본다면 포겔이 인종차별을 옹호한다는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 있지만, 사실 그의 연구는 노예제도의 효율성만을 주장한 것이 아니라 노예제도는 남부에 있어서는 효율적인 제도였으며, 남북전쟁, 인권, 정치 등 경제에서 외적인 요인이 아니면 노예 제도가 해체될 수 없었다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이다. 즉, '노예제는 쇠퇴 중이었고 흑인 노예들은 북부가 제시하는 자유에 부담스러워하였고 부정적이었다.'란 것을 반박하는 것이다. 또한, 포겔 본인도 1949년 흑인 여성 에니드 카산드라 모간과 결혼해서 두 아이를 둔 사람으로 당시 인종차별적 정서로 인해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다. 포겔의 연구는 당시 노예제를 옹호하는게 아니라 "어차피 노예제는 경제적 비효율성과 낮은 수익률 때문에 알아서 폐지될 예정이었다"라는 경제발전 결정론자들을 반박하는 취지이다. 또한 경제구조적 결정론자들 중 일부는 여기서 한발짝 더 나가서 "남부와 북부의 경제적 구조의 차이를 이해하지 못 한 에이브러햄 링컨이 군사력을 동원하여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존 브라운같은 노예해방운동가들은 과도한 폭력성을 통해서 경제 문제에 침투하려고 했다."는 식으로 이야기하며 링컨과 당시 북부의 전쟁 명분을 쓸데없고 폭압적인 과잉대응이고 윌리엄 로이드 게리슨, 존 브라운 같은 당시 노예해방론자들은 위험한 반사회적 또라이들이었다며 은근슬쩍, 혹은 노골적으로 남부옹호론으로 번지는 경향이 있다. 이를 반박하는 포겔의 연구는 오히려 노예제 옹호와 거리가 멀고, 남북전쟁이란 엄청난 대시련과 링컨의 도덕적 용기가 없었다면 노예제가 결코 '자연스럽게' 사라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에 가깝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